삶이란 공허함 <상도>, 서평


상도 1
국내도서
저자 : 최인호
출판 : 여백미디어 2009.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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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정말 재밌다. 잠을 줄이며 책을 새벽까지 읽어본 게 오랜만이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한 바닥을 읽다가 어느새 3권을 다 읽었다. 이 이야기는'어떻게 임상옥이 조선시대 최고의 부자가 되었는가'라는 겉포장 속에 일, 사랑, 놀이, 연대에 대한 가치관을 담고 있다. 다양한 한시와 중국 고사가 등장하고 , 소설의 밑바탕엔 불교적인 사상이 깊게 깔려 있으며 중요한 순간에는 천주교도 등장한다. 한 인물의 전기이자 종교서적이며 때로는 사업과 인관관계에 대한 실용 서적이 되는, 아무튼 곱씹어볼 여운이 많이 남는 재밌는 이야기. 


  

중국어가 준 기회 


돌이켜보면 임상옥 사업의 첫 시작점은 외국어였다. 어릴 때부터 중국어를 익히고, 중국지리와 문화에 밝았기에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상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부지런히 배웠던 기술이 빛을 발한 것이다. 게다가 어린 시절 절에서 1년 이상 글공부를 하는데 그것이 인생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삶의 스승인 '석숭스님'을 만나게 되므로. 임상옥은 중간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머리 깎고 몇 년간 중이 되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외국경험과 외국어 능력 그리고 절에 머무르며 스스로의 마음을 탐구한 것이 그에게 성취와 행복을 가져다 주었다. 


가장 어려운 건 여자


임상옥은 정식 부인이 1명 있지만 그 부인의 비중은 소설에서 먼지와 같다. 심지어 나는 그 사람 이름도 기억이 안난다. 대신 2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어린 시절 만나 정신적 사랑을 나눈 장미령, 30살 연하의 둘째 부인 송이 모두 기생이다. 가장 결정적인 기회를 준 것도 여자, 치명적인 위기를 준 것도 여자다. 조선 최고의 부자가 되고, 원님도 되었지만 명예, 재물, 지위에 그는 초연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여자는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송이와의 인연을 단호하게 끊으면서도 임상옥은 죽기 직전까지 송이를 그리워 한다. 재물과 지위를 버리고도 아무런 미련도 없던 그는 사랑만은 집착했다. 


혼자 이뤄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삶의 스승 석숭스님, 시련이 있을 때 해답을 준 김정희, 마음속에 불을 지핀 친구 이희저, 임상옥을 발굴한 사업 동반자 박종일, 정치적 후원자 박종경, 사업자금을 제공한 장미령, 재무를 관리한 홍경래 그리고 인생의 뮤즈가 된 송이. 임상옥 개인의 능력보다 더 소중했던 것은 그를 있게 한 사람들이 아닐까. 부와 명예 그리고 마음의 도를 이룬 것은 임상옥 자신이지만 그 경지에 이르게 한 사람은 주변 사람들이었다. 사람들과 평생 지은 인연이 업이 되어 임상옥에게 돌아갔다. 임상옥은 옷깃만 스쳐도 그 인연에 생명을 불어 넣는 사람이었고, 그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삶에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삶이란 한 방울의 물을 바다에 던지는 것


서럽게 죽었던 아버지를 위해 '천하제일상'이 되고자 했던 임상옥은 그 목표를 이뤄낸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어땠는가. 그는 삶의 목표를 이루고 사람들이 존경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송이와 함께 하지 못해서 괴로워한다. 이 소설에서 장사의 비결 혹은 성공의 방법을 찾는다면 완전히 길을 잘못 들어온 셈이다. 석숭과 임상옥은 삶은 짧고 성공은 운이기 때문에 다만 그릇을 기르는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계영배라는 술잔(일종의 그릇)이 가장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하는 게 아닐까. 둘 다 그릇을 이루었으나 한 여자와 행복하게 함께 사는 삶은 담지 못했다. 삶에서 마음대로 안되는 게 있는 거다. 그릇에 운이 담길지 말지는 저 먼 뜻에 맡길 뿐. 석숭과 임상옥은 그릇자체로 예술이었으며, 그들의 인생을 말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언어의 맛을 느끼게 해줬던 구절들


1권


명차는 바로 저런 차를 가리키는 것이오. 세월이 흘러도 한결 같은 차, 언제 봐도 새 것 같고, 세월이 흐르면 정이 들어 다정한 친구 같은 차, 그것이 바로 명차인 것이오. p.40


석전은 여자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여자 중에서도 젊고 예쁜 여자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여색을 탐하거나 호색하는 편은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꽃의 꿀이 아니라 꽃의 향기야." p.71


그는 온몸 전체로 붓을 쥐듯 혼신의 힘을 다해서 붓을 세워들었다 .내가 선지를 펼치자 그는 비수를 들어 맹수의 숨통을 끊어버리듯 격렬한 몸짓으로 붓을 종이 위에 내리찍었다. p.82


날씨가 쌀쌀해지자 푸득푸득 털갈이를 하는 짐승에서 잔털이 날리듯 밤하늘에서 싸락눈이 다시 흩날리기 시작하였다. p.84


인간은 돈에 의해 살 수 없으며, 또한 돈에 의해서 팔 수 없으며, 돈에 의해서 지배 받거나 돈에 의해서 복종할 수도 없는 단 하나의 존재인 것이다. p.130


그제야 밖으로 타오르고 있는 붉은 불빛아래 여인의 얼굴이 분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 순간. 임상옥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불비 아래 드러낸 여인의 얼굴은 일찍이 본 적도 없고 앞ㅇ로도 볼 수도 없는 천하의 절색이었던 것이다. p.134


임상옥은 물끄러미 여인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붉은 등불 아래 드러난 여인의 모습은 천상의 아름다움이었다. 이런 천하의 절색은 앞으로도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것이다. .. 눈물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일까. 한바탕 울고 난 여인의 모습은 이슬을 머금은 모란꽃처럼 매혹적이었다. p.141


만두를 먹던 장미령의 눈에서 눈물이 굴러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눈물을 보자 임상옥의 마음이 찢어지는 듯 하였다. p.164


결국 어떤 형태의 '옳은 일'은 크건 작건 그냥 사라지는 법이 없이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게 돼 있다. 그와는 반대로 어떤 형태든 '옳지 않은 일'은 크건 작건 그냥 사라지는 법이 없이 반드시 나쁜 열매를 맺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진리다. p.164


"물론 도에 들어 깨우쳐 부처님이 되시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불이 어찌 산속에만 있겠습니까. 저잣거리에도, 주막집에도, 색주가 속에도 불도는 있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저희와 같은 장사꾼들이 물건을 사고 파는 일을 하는 것도 하나의 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p.203


이 때 박종일이 말했던 내용들은 임상옥 일생일대의 분수령이 되는 것이었다. 만약 임상옥의 일생에 있어 박종일이 나타나지 않았떠라면 고승 하나는 태어났을지 모르지만 조선 최고 최대의 무역왕 임상옥은 탄생되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p.204


방 안에는 호롱불 하나만 깜빡이고 있을 뿐 어둡고 적적하였다. 밖으로는 바람이 세어졌는지 쏴아아- 소나무 숲을 달려나가는 솔바람소리가 말발굽소리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p.217


"이 몸은 살아도 대인어른의 것이며 죽어도 대인 어른의 것이나이다. 대인어른께서 저에게 베풀어주신 은덕을 단 하루도 잊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남에게 은혜를 베풀어주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타인으로부터 받은 은덕을 절대로 잊지 않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미령은 의로운 사람, 즉 의인이었던 것이다. p.256


"한 번 안아보시겠습니까. 이 아이를 낳은 것은 저입니다만 이 아이를 태어나게 하신 분은 대인어른이십니다." p.276


임상옥이 거상이 될 수 있었떤 것은 돈을 벌었으나 돈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명예를 얻었으나 명예를 누리지는 않았고, 풍류를 즐겼으나 쾌락에 탐닉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평생을 크게 소유하였지만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여 본 적은 없었다. 그는 상업을 통해 도인의 길을 걸었던 수도자였다. '부자는 인간 스스로가 만들지만 거상은 하늘이 낸다'는 말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p.280


"맞았어, 맞으이. 하루에 숭례문을 드나드는 사람은 단 두 사람 뿐이네. 우리집 대문을 드나드는 사람도 하루에 단 두 사람 뿐이네. 내게 이로운 사람과 해로운 사람, 단 두 사람 뿐이야. 으핫핫핫핫". p.327


매화꽃이 피어 만발하는 데에는 오랜 시일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따듯한 봄의 시절과 봄볕의 인연만 맺으면 매화꽃은 어느 한 순간에 눈을 뜨고 피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옹방강이 김정희의 입춘이었따면 완원은 김정희의 양광이었다. p.368


2권


자고로 곳간은 함부로 열어주는 법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낙네들의 속살과 곳간은 은밀히 숨어 있어야 하지, 남의 손때를 타면 부정을 입는다 하였습니다. p.50


온갖 현묘한 말재주를 다 부려도 터럭하나를 허공에 날린 것 같고, 온 세앙의 온갖 재간을 다 부려도 한 방울의 물을 바다에 던진 것 같다. p.130


사람은 오래 살고 명예와 지위를 누리고 재물을 많이 모으려 발버둥 친다. 그러나 이것은 외물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목숨이나 명예, 재물, 지위에 초연할 수 있을 때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의 뜻있는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p.134


밖에는 소나무숲을 달려가는 솔바람 소리가 말발굽처럼 들려오고 있었지만 방 안에는 호롱불 하나만 깜빡이고 있을 뿐 적적한 깊은 밤이었다. p.137


수평성 너머로 이미 해가 졌는지 선혈과 같은 붉은 노을이 수술대 위에 마취된 환자의 혼수상태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ㅔ.193


넓은 음식점의 실내에는 세 사람 뿐이므로 우리는 함께 어울리고 있었지만 결국은 모두 혼자였다. p.208


밤하늘엔 엄청나게 큰 달이 떠 있었고 월광이 잔잔한 바다 위에 일렁이고 있어서 바다는 마치 거대한 꽃밭과도 같았따. p.210


내가 그 손님에게 천 냥을 꿔준 것은 그가 돈에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돈으로써 돈을 벌려는 사람은 절대로 돈을 벌 수 없습니다. 돈은 사업을 하다보면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지 돈을 좇으면 사업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p.228


임상옥은 송이에게 있어 그저 사랑하는 임에 지나지 앟았다. 보는 것마다 임의 얼굴이었으며 듣는 것마다 임의 목소리였다. p.339


3권


우명옥은 계향의 몸에서 처음으로 육체에 눈이 떴다. 그것은 쾌락이 아니라 극락이었다. p.37


지 외장은 단 하루도 우명옥을 기다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문을 덜컥이는 바람소리에도 행여 아들이 돌아온 것이 아닐까 귀를 세우고 있었다. 문밖을 굴러다니는 낙엽소리에도 행여 하들의 발자국 소리가 아닐까 소스라쳐 놀라 깨곤 하였다. p.83


현자는 모든 것에서 배우는 사람이며 강자는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며 부자는 자기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p.126


임상옥이 구름이라면 송이는 비였고, 임상옥이 산이라면 송이는 아침의 구름이었다. 임상옥이 물새라면 송이는 마름풀이었고 임상옥이 거문고라면 송이는 비파였다. p.142


사슴을 쫓는 사람은 산을 보지 못하고, 금을 움켜쥐려는 자는 사람을 보지 못한다. 


퍼뜩 정신이 든 임상옥은 누운 자세에서 일어나 정좌를 하고 앉았다. 폭포물로 전신을 씻은 듯이 정신이 맑아졌다. 임상옥은 까마득히 오래 전에 들었던 석숭 큰스님의 목소리를 기억하며 떠올렸다.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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